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이쓰쿠시마 행차 === 쇼안 2년(1172년) 홋슈지도노 남쪽에 시게코의 발원으로 새 법당이 지어져서 2월 3일에 상량식이 열렸다(《햐쿠렌쇼》, 《교쿠요》). 이보다 앞서 가오 2년(1170년) 4월 19일에 고시라카와인은 [[도다이지]]에서 수계를 받기 위해 나라로 향하던 도중, 우지의 평등원(平等院)에 들러 본당에서 설계도를 열람했다(《효한키》). 쇼안 원년(1171년) 11월에도 시게코를 데리고 다시 방문하여(《교쿠요》 11월 1일조) 평등원을 모델로 한 법당을 지을 것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짓기 위해서 여러 쿠니(국)마다 부과된 무거운 세금에 대한 호소가 잇따르는 등 공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쇼안 3년(1173년) 10월 21일에 완성 공양식을 열고, 새로 완성된 불당의 이름을 '''최승광원'''(最勝光院)으로 붙였다(《햐쿠렌쇼》, 《교쿠요》). 그 화려함과 웅장함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라 일컬을 만큼 대규모의 것이었다. 쇼안 4년(1174년) 3월 16일에 고시라카와인은 시게코와 함께 아키(安芸)의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에 참배하기 위해 교토를 떠나 후쿠하라를 경유해 26일에 도착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후쿠하라에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제공한 송선(宋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황 혹은 상황이 황후를 동반하고 바닷길을 지나 먼 곳까지 여행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고, 당시 구교(공경)였던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는 >"이는 선대의 규범이 아니며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 바람과 파도를 헤치며 수고롭지 않은 길이 없었을 것을 상하가 비록 놀랐다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已無先規、希代事歟、風波路非無其難、上下雖奇驚、不及是非)(《깃키》(吉記) 3월 16일조) 라며 경악했다. 이쓰쿠시마 참배에는 키요모리에 대한 정치적 배려의 측면도 있었지만, 단순히 시게코와 함께 당대의 절경을 자랑하던 이쓰쿠시마 진쟈(신사)를 보고 싶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시라카와인의 많은 후비들 가운데 그가 굳이 먼 여행에 데려가거나 한 것은 시게코밖에 없었다. 이쓰쿠시마에서 고시라카와인은 회랑 아래로 흐르는 물결이나 산•언덕의 풍경을 즐겼고, 무녀(巫女)의 춤을 보고는 >"기악(伎楽)의 보살(菩薩)이 춤사위를 보인다 해도 이같지는 못할 것이다." 라며 감탄했다. 이윽고 무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후세의 일을 말하는 것은 감심(感心)할 일이다. 이마요를 들려주거라." 라는 신탁을 내자 고시라카와인은 >"사방에서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에/온몸으로 기뻐하기에도 과분하다/우리가 후세에 부처가 될 것을/오늘에야 확실하게 듣겠도다."(四大声聞いかばかり、喜び身よりも余るらん、われらは後世の仏ぞと、確かに聞きつる今日なれば) 라는 이마요를 불렀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키요모리는 >"이 신께서는 후세(後世)의 소원을 아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라고 설명했다고 한다(《료진히쇼 구전집》) 귀경 뒤인 7월 8일에 구가 마사미치(久我雅通)가 고다이쇼직을 사임하자 후임 인사로 타이라노 시게모리와 가잔인 가네마사(花山院兼雅)가 후보에 올랐지만, >"선문(禪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마음이 시게모리에게 있어"(《교쿠요》 7월 9일조) 라는 기록처럼 키요모리의 후광으로 시게모리가 임명되었다. 이듬해 안겐 원년(1175년) 2월에 구가 마사미치가 사망하면서 나이다이진(내대신)이 공석이 되었는데 좀처럼 후임이 정해지지 않다가 11월 10일에야 간신히 후지와라노 모로나가가 임명되었다(《교쿠요》). 모로나가가 맡고 있었던 다이나곤은 시게모리가, 시게모리가 맡고 있었던 곤노다이나곤은 후지와라노 나리치카가 맡게 되었다[* 인(원)의 근신과 헤이케 간의 대립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절실했다]. 안겐 2년(1176년)에 고시라카와인은 50세가 된 것을 맞이해 3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홋슈지도노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이 시기의 천황이나 상황은 50세까지 사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단명하고 있었기에 증조부인 [[시라카와 덴노|시라카와 법황]]의 '고와의 예'에 따라 예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연회에는 고시라카와인과 시게코, 다카쿠라 천황과 중궁 타이라노 도쿠코, 조사이몬인 · 슈카쿠 법친왕 등의 황실 일가와 칸파쿠(관백) · 다이진(대신) · 구교 · 헤이케 일문이 두루 참석해, 첫날은 춤과 음악, 다음날에는 배를 띄워 놀며 관현을 연주하거나 축국을 했다. 마지막 날에는 다카쿠라 천황이 몸소 피리를 불어서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축하연이 무사히 끝나고 고시라카와인은 시조 다카스에(四条隆季)를 사자로 보내 축하연에서의 헤이케 일문이 보여준 모습들에 대한 칭찬을 담은 인센을 키요모리에게 내렸고, 키요모리는 금 100냥을 넣은 백은 상자를 답례로 보냈다{《안겐미카기》(安元御賀記)}. '''이 축하연은 고시라카와인과 헤이케의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축하연 이후인 3월 9일, 고시라카와인은 시게코를 데리고 셋쓰 국의 아리마 온천에 행차했다(《햐쿠렌쇼》). 4월 27일에는 히에이 산에 올라 천태좌주 묘운으로부터 천태종의 계를 받아 엔랴쿠지와의 관계 회복을 도모했다. 그러나 6월에 시게코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져, 7월 8일에 훙서하고 말았다. 잇따라 다카마쓰인(高松院), 로쿠조 상황, 구조노인(九條院)도 사망하면서, 축하연에서의 화려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